중국 이야기 열한번째 - 국공내전

중국의 모든 것|2019. 2. 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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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Supreme Review 입니다. 어느덧 중국 이야기가 11번째가 되었네요. 조금이나마 중국을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셨나요? 도움이 되셔야 제가 힘이 납니다.농담이구요. 제가 이전 글에도 작성했듯이 중국은 원래 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럼 어떤 배경으로 지금의 중국이 탄생하게 되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읽는 분들은 이전글을 참고해주시면 조금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겁니다.


2019/02/15 - [중국의 모든 것] - 중국 이야기 첫번째 - 기본 정보

2019/02/16 - [중국의 모든 것] - 중국 이야기 두번째 - 베이징

2019/02/17 - [중국의 모든 것] - 중국 이야기 세번째 - 상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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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 [중국의 모든 것] - 중국 이야기 열번째 - 중화민국




국공내전


제 1차 국공합작과 국공내전

국공내전 1945년 ~ 1950년간 중국의 국민당과 중국의 공산당이 벌인 내전입니다. 청나라가 무너지고 1912년 중화민국이 건국되습니다. 그 당시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서방 국가들에 의해 고립이 되고 있던 소련은 중국을 탐하게 됩니다. 중국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자신의 우방으로 만들려고 했죠. 이 당시 중국의 영토는 세계 3~4번째를 차지할만큼 거대한 나라였기 때문에 우방으로 두면 고립되고 있던 소련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련의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공산당이 중국에 생겨나게 되고, 국민당과 협력하는 그림으로 운영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합니다. 전편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각지의 세력들에 의해 나라가 개판이 되었을 때 국민당이 이를 진압했다고 했는데,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배경이 이렇습니다. 국민당은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군대를 양성하여 각지의 세력들을 진압을 시작합니다. 이때 공산당은 국민당과 협력하여 중국의 국민당에 의해 통일이 되는 듯 했습니다. 당시 쑨원이 공산당을 탐탁치 않아 했고, 국민당에 협력하는 공산당원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아 힘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쑨원이 죽은 뒤 권력을 잡은 장제스가 1926년 중산함 사건으로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소련고문들을 모두 강제 귀국시켜버립니다. 이로 인해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하지만 북벌정벌로 힘이 강력해진 장제스는 결국 4.12일 상하이 쿠테타를 일으켜 독자적인 난징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립니다. 이에 단단히 화가난 소련은 공산당에게 자체적인 무장 세력을 만들었고,  국민당 중앙 집행 위원회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각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켜 중요 도시를 장악하려 했던 공산당은 폭동들이 모두 실패에 거듭하자, 마오쩌둥, 주더, 장궈타오를 비롯한 유격대 지휘관들이 지휘하는 홍군이 15군데에 달하는 소규모 해방구를 설립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국민당 정부는 이를 토벌을 감행했습니다. 이후 상하이에 있던 마오쩌둥이 이끌던 강서성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면서 내전을 지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3차 초공작전 이후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주석인 마오쩌둥과 상하이 이미당 중앙의 노선 갈등이 삼화하여 결국에는 마오쩌둥이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납니다.


제 2차 국공합작과 국공내전


홍군이 멸망하지 않고 세력을 계속 확장합니다. 그래서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홍군 토벌을 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장쉐량의 군대가 홍군과의 전투에서 참패를 하게되었고, 이때 공산당측이 같은 중국인끼리 싸우지말고, 일본군과 싸우자 라고 설득하여 비밀리에 장쉐량과 홍군이 휴전협정을 맺습니다. 이에 열받은 장제스가 장쉐량을 찾아갔지만, 오히려 장쉐량은 장제스를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단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합니다.
 국민당의 밑에 들어가는 척하면서 홍군은 일본군과의 교전은 극도로 회피하고 홍군의 지배 영역을 늘리는 데 치중합니다. 국민당이 일본군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타 홍군이 국민당의 유격대나 국민당 부대들을 필요에따라 닥치는 대로 습격했고, 국민당의 지방정부를 소멸시키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합니다. 이에 열받은 국민당은 전쟁은 안하고 뭐하는 짓이냐고 따졌지만 공산당은 쿨하게 무시해버립니다. 그로인해 열받은 국민당은 공산당에 대한 원조를 모두 끊어버리고 실질적으로 국공합작을 깨버립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는 화평교섭화담을 개최해 쌍십협정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이 협정을 공산당은 이행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화북 5성과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계속적으로 국민당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 후 1948년 홍군은 중국 인민 해방군으로 개칭을 하며 5개의 야전군을 편성한다. 사실 국민 혁명군이 공산당을 완전히 타도할 뻔 했었다. 하얼빈까지 치고 올라갔던 국민 혁명군은 거의 통일을 할뻔했지만, 이때 홍군이 미국에게 정전 협정을 국민당이 어겼다고 고자질 하는 바람에 미국이 더 이상 진격할 경우 원조를 중단한다고 경고했고, 당시 엄청난 원조를 하고 있던 미국의 말을 어길 수 없었기에 장제스는 휴전을 명령한다. 마치 우리나라와 상황이 비슷하죠? 우리나라도 거의 통일할 뻔했지만 그때 갑자기 휴전을 해버리는 바람에.. 아무튼 미국에 의해 중단된 틈을 타 공산당은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가 된다.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공산당은 진격을 했다. 인민 해방군이 계속 남진하며 양쯔강에 이르렀는데, 국민당은 이를 ㄱ경계로 중국을 남북으로 갈라 지배하자고 했다. 공산당과 이 안에 대해 협상을 벌였지만, 공산당은 대신에 장제스 외 48명을 체포하고 헌법을 폐지할 것 등의 8가지 조건을 내걸었지만, 당연히 국민당은 거부하게 된다. 그리하여 협상은 이뤄지지 않았고 인민 해방군은 도하작전을 펼친다. 양쯔강 방어선이 뚫린 중화민국은 수도인 난징을 함락되고, 국민 정부는 광저우로 퇴각한다. 이 후 광저우까지 함락되자 충칭까지 퇴각을 했지만 인민 해방군이 충칭까지 진격해오자 50만명의 군대를 데리고 타이완으로 도망간다. 그리하여 인민해방군은 타이완까지 점령하기 위해 준비를 하지만 그 당시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을 지원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중단되게 된다. 국공내전은 한국사에도 큰 의미를 가진다. 만약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지 않았다면 6.25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공내전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국공내전의 의의

국공 내전의 승리로 인해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점령함에 따라 중국 주변의 나라에 공산 세력을 지원하게 된다. 그 후 아시아에서의 자본 세력과 공산 세력간의 냉전구도를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6.25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다. 


국공내전의 여담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진짜 만약 국공내전이 무승부로 끝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글머 황허, 회하, 양쯔강을 경계로 북과 남으로 나뉘었을 것이다.중화인민공화국은 수도를 베이징, 중화민구근 난징이 됐을 것이며, 국제적으로 표기도 북중국과 남중국으로 불리게 됐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마카오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좀 더 오래 남아있지 않았을까 싶다. 



조금이라도 도임이 되셨다면,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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